복싱의 기원 | 규칙 및 길라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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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조각이나 벽화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복싱은 b.c 3000전에 시작되었다.
제 23회 고대 올림픽경기에서 복싱이 처음으로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으며 최초의 금메달 리스트는 SMYRNE 이다.
제 41회부터 소년 복싱이 시작되었고 왼손복서인 TISANDROS가 b.c 572-560 에 올림픽대회에서 4연속 우승을 하였다.
그후 그리스도신부들의 요청으로 로마 황제 호노라스가 복싱을 금지 시켰고 서로마 제국의 멸망과 더불어 음지에서 행해지던 복싱이 부활하기 시작하였다.
1000년경에 공식적인 경기장에서 시합이 시작되었고 신교도인 MERCURY가 처음으로 복싱운동을 인정하였다.
1719년에 JAMES FIGG가 참피온에 올랐고 이때는 체급의 구분이 없었으며 1730년 까지 계속 참피온타이틀을 유지하였다.
1946년에 JACK BROUGHTON이 최초의 규정을 발표하여 "BROUGHTON"라 정하였다.
그후 1892년 글러브를 끼고 1라운드는 3분으로 하고 휴식은 1분으로 하며 다운이 되어 10초 이내에 일어 나지 못하면 상대편의 승리로 인정하는 QUEENS BERRY의 규칙이 제정되었다.
1896년에 근대올림픽이 개최됨에 따라 세계각국에서 복싱연맹이 결성되어 국제교류가 시작되었다.
1946년 AIBA가 영국 런던에서 발족하였고 1964년 전세계의 복싱인구는 182개국에서 약 200만명이 활동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복싱이 소개, 발전되기까지는 약100년의 역사를 가진다. 그 기간은 국운을 비롯한,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등 각 방면에서 급격한 변화를 맞았던 격동기였다.
우리나라의 복싱이 어떠한 과정으로 성장해 왔으며, 그 결과 우리 국민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관해 4단계, 즉 태동기(1912∼1935), 개척기(1936∼1944), 발전기(1945∼1960), 도약기(1961∼1955)로 나누어 고찰해 보기로 하자.
태동기는 서구 스포츠를 처음으로 받아들이는 신교육의 형성기요, 근대 스포츠의 수용기라 할 수 있다. 이 시기는 우리 민족이 일본 제국주의 하에서 반항의식과 이민족에 대한 피압박민족의 울분이 분출했던 때이다.
개척기에 접어들면서 이러한 의식은 대일 투쟁 의식으로 발전해 나갔으며, 스포츠를 통해서 더욱더 적나라하게 표출되곤 했다. 특히 1 對 1 경기인 복싱에서는 학생은 물론 일반 사회인도 그 상대가 일본인이었을 때에는 사력을 다해서라도 이겨야겠다는 필사의 정신이 발로가 되었다. 복서 개개인이 독립투사의 정신으로 경기에 임할수록 일제가 그들에게 가하는 유명무형의 제재는 컸었고, 스포츠맨으로서 그들의 무대와 생활을 제약받았다.
1945년을 기점으로 하는 발전기에는 서구문화의 급격한 국내 유입과 함께 활동무대를 국외로 전전하던 많은 선수들이 속속 귀국하여 국내경기를 갖게 되었다. 따라서 프로복싱이 성황을 이루었으며, 아마추어 또한 성대한 출발을 도모하던 중 6.25전란을 맞았다. 전쟁 중, 또는 휴전기인 이 시기에도 헬싱키 및 멜보른 올림대회에 출전한 복싱 선수들은 동메달과 은메달을 각각 획득하여 전시하의 국민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이는 곧 신생 독립국가인 한국을 세계 체육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어다. 즉 복싱계가 국제 무대에서의 성장 여부를 시험해 본 국제 경험을 얻은 시기라 할 수 있다.
도약기인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우리나라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 착수 하게되고, 국민의 생활수준도 향상되면서 국민들의 체육에 대한 관심과 애착이 점차 커져갔다. 따라서 이 시기는 특히 프로 복싱계의 황금기라 할 만큼 각 체급에서 세계의 정상을 쟁취하는 챔피언이 속출했다. 그들 챔피언은 매스컴과 국민들의 열광 속에 일약 스타로 탄생됨과 동시에 명성과 부를 함께 얻게 됨으로써 복싱계의 발전을 크게 자극 시켰다.

1)태동기

(1)복싱의 도입

우리나라에서 서구 스포츠가 도입. 실시되기 시작한 것은 1885년과 1886년에 각각 설립된 배재 학당과 경신학교에서이며, 그 전수자는 일부 서양 선교사들이다. 복싱도 물론 이때에 도입되었지만, 1912년 10월7일 박승필이 유각 권투 구락부를 조직하여 회원들간에 실시하게 된 것이 시초이다. 이 구락부가 있던 단성사에는 체육보급을 목적으로 복싱, 유도, 씨름 세 종목의 경기가 개최되었다.
1916년대는 당시 황성 중앙기독청년회 총무로 있던 Gillet(미국)가 복싱 글러브를 갖고 와서 회원들을 지도하였다. Gillet는 우리나라에 야구와 농구를 전한 사람이기도 하다. 특히 그 당시에 농구와 야구 선수였던 이혜택과 이혜봉 형제가 복서로서도 크게 활약하여 우리나라의 복싱 보급에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2) 한국 복싱의 개척자

한국 복싱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이혜택은 수 년 동안 복싱 보급에 열을 올리는 한편, 1922년 12월 24일에 미국인 수바를 맞아 YMCA실내경기장에서 시합을 가졌던 바, 주심 버네트에 의하여 RSC(Referee Stop Contest)승을 거두기도 하였다. 이 경기는 한국에서 개최되고, 한국인이 출전한 한국 복싱 경기의 시초이다.
태동기의 한국 복싱을 지도, 보급함에 앞장섰던 인물로는 박승필 .이혜택 형제 외에도 김영구. 성의경 .황을수 등이 있다. 김영구는 1924년 YMCA주최 제 1회 전 조선 복싱대회가 동아일보사 후원으로 개최되어 4체급(플라이. 페더. 웰터. 미들급)의 승자를 탄생시켰다. 이 대회는 한국 최초의 복싱선수권 대회로서 제 14회 (1941년)까지 계속되었다.
일본에서 복싱을 익히고 귀국한 성의경은 1929년 9월17일에 식도원에서 조선권투회를 창설하고 훌륭한 복서들을 배출해 내는 데 썼다. 창설 3년 만에 그는 5명의 제자 선수를 이끌고 일본에 원정, 우승하였다. 같은 해인 1932년, 라이트급의 황을수 선수가 제 10회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출전해 한국 최초의 올림픽 출전 복서가 탄생되었다.
1933년 4월에는 경성일보사 주최로 일본 Jenseu 대학팀의 내한 경기가 있었는데 조선권투구락부팀이 승리하였고, 6월에는 Waseda대학팀이 내한, 2차에 걸친 경기에서 모두 국내 팀이 우승하였다. 그 여세를 몰아 같은 해 10월, 우리나라 팀이 일본에 원정하여 도쿄(동경), 나고야(명고옥) 등지를 돌며, 4차례에 걸친 경기에서 모두 승리하였다. 이와 같이 일본과의 경기에서 필승을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은 복서 각자가 가졌던 민족자존의의 암울했던 시대에 활력을 주는 애국심의 발로에서였다고 할 수 있다.

(3)국가조의 사조

19세기 초, 덴마크의 나흐테갈(Nachtegall, F. 1737∼1843)은 국가주의적 애국심의 발로로 체조를 창안하였고, 스웨덴의 링(Ling. F. L. 1787∼1852)은 체조를 통하여 조국의 해방과 통일, 그리고 자유를 쟁취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스포츠를 통한 이러한 애국정신의 발로를, 우리는 1934년 1월 20일 서울 천향각에서 조직된 조선 아마추어 권투연맹의 발족 취지문에서 발견하게 된다.
"수문연무(修文鍊武)는 민족흥륭(民族興隆) 상론(常論)이다. 조선이 금일에 가장 부족한 것은 무(武)의 훈련이다. 근일에 일반적으로 승무의 기풍이 진작되는 것은 중흥의 조짐으로 희가 (喜架) 할 일이다. 복싱처럼 정신을 집중하고 긴장하고 최후의 일순까지 싸우고야마는 운동은 없다. 복싱 링에서 Boxere spirit(복싱투혼)을 전 국민이 모두 가진다면 그 민족은 문화의 각 방면에서 놀라운 위력을 발휘 할 것이다."

(4) 한국 복싱의 푸른 싹

민족투혼의 결의를 강조한 복싱인들의 활동은 날로 활발해져서 1935년 6월에는 황을수가 사재(당시의 거금 1만원)를 들여 수표동에 동양권투회관을 건립, 복싱 보급에 박차를 가하였다. 당시 코치로 활약한 노병렬(1914∼1972) 등 많은 복싱 선배들의 피눈물나는 노력은 후대 한국 복싱의 훌륭한 밑거름이 되고 있다.
프로 복싱계 세계랭킹 6위(플라이급)에 오른 서정권 선수는, 일본인 이름으로 개명하여 출전했던 인물로 작은 표범(Littie Tiger) 이라는 병명을 가졌었다. NBA 세계 밴텀급 챔피언인 미국인 영 토미와 미국에서 3회에 걸쳐 대전했던 한국인으로서 미본토 상륙 첫 복서가 되었다. 다만 그가 이 민족의 통치라는 불운한 시대에 제한된 활약으로 그 기량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지만 뛰어난 선수였다.

2) 개척기

이 시기는 일제의 식민지 탄압이 더욱 고조되었던 때다. 1937년, 소의 만주사변의 발발과 함께 일제는 한국내의 스포츠 활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1938년 5월에 조선체육회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그러한 와중에도 라이트급의 이규환 선수는 일본 선수를 KO로 물리치고 제 11회 베를린 올림픽대회 (1936년)에 출전하였다. 물론 일본을 대표한 선수로 출전한 것이지만, 당시 한국인으로서 올림픽 출전 선수가 되려면 일본인의 대전에서 KO승이 아닌 판정(Win on points)으로서는 불가능하였다. 그 때문에 KO결정이 있을 때까지 연장전 제도 임시변통으로 통용되었던 것이다.
일제의 탄압이 날로 극심해가던 이 시기에는 국내 복싱경기도 1년에 1회 정도의 행사 밖에 치를 수 없었다. 즉 표면적인 피압박민족 강한 저항의식을 발로하기 어렵게 됨에 따라 1년에 한 두 번의 복싱경기라도 개최하고 내실, 즉 스포츠 적 성격을 기능을 신장시켜 나갔다.
1945년 광복 직전까지의 복싱 행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37년 9월 29일, 조선일보사 강당에서 전조선 권투선수권대회가 개최되어 플라이급. 밴텀급. 페더급. 라이트급. 웰터급 등 5체급에서 선수가 탄생하였다.
1938년 5월 21일, 서울운동장에서 전조선 對 필리핀과의 대항전이 개최되었는데, 이때 승점은 1, 무승부는 0.5로 계산하여 3.5대 1.5로 점수제에서도 승리하였다.
1939년 11월 18일에는 미국 썬 토세 (Sun Tose)대학팀을 초청하여 경기를 가졌으며, 1940년 1월에는 동양 권투회팀이 전 일본을 대표하여 필리핀 원정경기를 갖기도 했다. 동년10월에는 전 하와이 팀의 내한 친선경기에서 3대 2로 승리하였다.
1941년 7월 28일, 동양권투회팀이 일본 도쿄에 원정, 후니구락부팀과 대전하여 3대1로 승리하였다.
이와 같이 다시 한국 복싱은 일본 복싱계를 석권하였다. 이에 일본은 소위 대동아전쟁시에 체육운동을 전쟁 목적 수행에 결부시키는 한편, 이를 완전 통제하기 위하여 조선 체육진흥회를 발족시켜 국방경기라는 전기(戰妓) 훈련을 등장 시켰다. 이러한 의도와는 역행하여 일제의 배타정책의 극성은 마침내 운동경기에까지 미쳐 적성스포츠라는 구실로 미영식 (美英式) Ball Sports 경기에 이어 복싱의 경기 개최 중단에 이르렀다.
한편, 이러한 상황에서도 국내와 일본 등지에서 맹활약하던 강펀치의 소유자들은 중국 상하이에서 주로 활동하다가 1945년 8.15 해방을 맞아 귀국함으로 개척기의 한국 복싱은 바야흐로 발전기를 맞게 된다. 이 전환기에서 두드러지게 활약한 선수로는 정복수. 박형권. 소앙현 등이 있다.

3)발전기

1945년 8.15 광복직후인 10월 23일, 대한아마추어복싱연맹이 조직되었고, 1951년에는 그동안 두 단체로 양립해 있던 프로복싱이 통합되었다. 해방과 더불어 복싱계가 힘찬 부활을 하게 된 것이다.
아마추어 복싱은 1947년 제 14회 런던올림픽대회에서 플라이급의 한수안 선수가 동메달을 획득하는 쾌거를 올렸다. 광복의 환희와 아직 정비되지 않은 사회환경 속에서 체육인이 거둔 큰 성과였다. 그러나 1950년 6.25동란의 발발은 복서로 하여금 전쟁 수행과 복서 기능을 동시에 요구하였다. 조국의 존망이 예측 불허했던 전시에 제 15회 헬싱키 올림픽대회(1952년)에 참석한 벤텀급의 강준호 선수는 동메달을 획득했으며, 1956년 제 16회 멜보른 올림픽대회에서는 밴텀급의 송순천 선수가 은메달을 획득하였다.
한편 프로 복싱계는 1953년 9월 서울수복 직후 서울 명동에 사무실을 개설하고, 1955년과 56년에 마닐라와 방콕에서 개최된 동양 권투연명(O.B.F) 제 1,2차 총회에 임원을 파견하는 등 복싱 외교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1953년 3월, 당시 국회부의장이던 이재학이 한국권투의원회 회장에 추대됨으로 복싱이 국가적인 체육으로 성장할 기틀을 마련했으며, 같은 해 제 3차 동양권투연맹총회가 서울에서 됨으로써 한국 복서들의 대아시아 대전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1958년 1월 28일, 일본 도쿄에서 제2차 대전 후 처음으로 한. 일 대항전이 있었으며, 이를 계기로 적대시하던 일본과의 사이에 스포츠맨십의 가교가 놓아졌다. 당시 복서로서 돋보이게 활동한 선수는 밴텀급의 심재근, 미들급의 강세철 선수였다. 이들 두 선수는 국내에서보다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에서 주로 활약하여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1960년 4.19혁명 직후, 회장단의 기능 상실로 집행부가 마비되었으나, 9월 임시총회에서 자유당 국회의원 이재학 대신 집권 민주당의원 유진산과 김형삼을 각각 회장과 부회장으로 추대함으로써 한국 복싱협회는 제 기능을 회복했다. 새로 구성된 집행부에서는 우리나라 복싱계도 선진 외국의 추세에 따라 커미션제도를 도입할 것을 결의함으로써 복싱 발전의 기틀을 더욱 다져갔다.
Korea Box Commission이 주관한 첫 경기로 1960년 11월 30일에 동양타이틀전이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되었다. 강세철 선수는 필리핀의 러시 메이언 선수를 맞아 주니어 미들급 초대챔피언 결정전에서 5회 2분 22초만에 KO승을 거둠으로써 국내를 축제분위기로 만들기도 하였다.

4)도약기

우리 나라에 복싱이 전래(1916년) 된 지 꼭 반 세기만인 1966년 6월 25일 김기수 선수가 이탈리아의 벤 베누티를 물리치고 WBA 미들급 타이틀을 획득함으로써 한국 선수로는 최초로 세계 정상 도전에 성공하였다. 이는 광복과 전란 이후 복서인이 국민에게 준 최대의 선물이었다.
프로 복싱계에서 신화를 창조한 것은 1974년 7월 3일 WBA 밴텀급 타이틀전이다. 홍수환 선수가 적지 남아공화국에서 챔피언 카라스키야선수를 맞아 4번 다운되고서도 상대를 KO시키고 새 챔피언이 된 것이다. 이 경기에서 보여준 홍수환의 승부근성은 국내의 많은 복서들에게 모범을 보여주었으며, 이를 계기로 하여 각 체급 세계 챔피언들의 탄생 및 우수한 선수들이 등장하였다.
아마추어 복싱계도 그 활동이 활발해져서 1961년에 대한석탄공사, 1962년에 해군 등 정부투자기관과 국군부대에 복싱부가 창설되었으며, 1963년 7월에 제 1회 성의경배쟁탈 전국 아마추어 복싱 선수권대회가 개최되었다. 전국에 복싱체육관이 70여 개나 확장 운영되고, 복싱인구도 점차 증가하였다.
특히 선진제국 복싱 기량을 도입하기 위해서 유명한 복싱 코치들이 많이 초청되었다. 1963년 10월에는 동경 올림픽을 대비하여 미국인 Joe Herman을 초청, 선수 훈련 강화에 박차를 가했고, 1972년에는 영국인 Terry Spinks가, 1982년에는 미국인 Christo G. Hitopolous, 1983년에는 Robert Dorsey, 1985년에는 캐나다 Bolish Gitman 등이 초청되어 한국 복싱의 새로운 기술 개발에 일조 하였다.
1982년, 한국 화약의 김승연 회장이 아마 복싱연명 회장에 취임함으로써 복싱 선수의 기량 개발과 복싱인의 활동이 한층 활발해질 수 있었다. 그 결과 1984년 LA올림픽에서는 금. 은. 동메달 각 1개씩 획득하여 한국 복싱의 저력을 유감 없이 발휘했다. 그 여세를 몰아 1986년 10회 아시안게임에서는 12체급 전체에서 금메달 획득이라는 복싱 역사상 초유의 획기적 성과를 거두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이와 같이 복싱계가 짧은 연륜 속에서도 장족의 발전을 거듭했던 것은, 1962년에 시작된 경제개발 5년 계획의 추진으로 국민들의 경제생활이 향상되었고, 국력신장의 여력이 체육계에 쏟아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정부와 기업체에서 복싱인의 활동을 적극 뒷받침하기 시작했으며, 그에 힘입어 복싱 인구의 저변이 확대 되어갔던 것이다. 그 단적인 예가 1960년대에 전국이 복싱체육관이 40개이던 것이 1970년대에는 70개, 1988년 초에 이르러서는 360여 개로 늘어난 데서도 쉽게 볼 수 있다.
또한 복싱인들의 국제활동 및 국제관련단체와의 교류 등에도 힘입은 바 크다고 하겠다. 1946년 행방 이듬해 4월에는 국제아마추어 복싱연맹(AIBA)에 가입하였고, 1960년에는 3명의 국내 복싱인이 국제 심판자격 (Licence)을 획득했으며, 1988년에는 9명으로 증가했다. 1982년이래 김승연 회장이 AIBA 부회장 겸 FAAB 회장으로 활동한 사실은 1974년 9월 탄자니아에서 개최된 AIBA총회에서 김택수 회장이 집행위원으로 선출된 이후 복싱 외교의 신장세를 나타내 준 것이라 하겠다.
도약기에 있어서 복싱의 발전은 국가의 정책적인 지원과 그에 따른 복싱의 저변인구 확대, 그리고 전국적인 체육관의 확장 등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는데, 특히 대한체육회에서는 1976년부터 연금제도를 마련, 국위를 선양한 선수들에게 훈련비를 지급하는 우대책을 마련했다. 이 제도는 1948년 제 14회 런던올림픽대회 이후 지난 제 23회 LA올림픽과 아시안게임까지 국제대회에서의 전적을 점수제로 계산한 후 금장. 은장. 동장으로 구분 매월 지급하고 있으며, 우수 선수들을 육성시킨 체육관 관장에게도 이 제도를 적용하고 있다.
이와 함께 1981년부터 전국 소년체전에 복싱을 정식 종목으로 채택하여 중학생들에게까지 확대시켜 나갔다. 이에 앞서 1977년 11월 이후 우수선수에게 장학금을 지급해 온 古 김명복배 학생선수권대회 등도 좋은 자극제 역할을 했다.
복싱의 저변인구가 이처럼 확장일로에 있게 되자, 종전에 대한 아마추어복싱연맹에서만 주관해 오던 경기를 중. 고등연맹, 대학연맹 및 전국 가지의 시. 도 연맹에서도 독자적으로 각종 복싱대회를 개최할 수 있게 되어, 선수들의 경기력 향상의 기회가 전국적으로 균등하게 확산되었다.
이들 연맹의 지원에 힘입어 국내 선수들간의 시합 뿐 아니라 외국 선수들과의 경기도 자주 가질 수 있게 되었으며, 국제 경기의 참가 횟수나 경기폭도 넓어졌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의 선수들이 올림픽경기나 아시안게임 외엔 참가하지 못했으나 그 후 King's Cup, Pre-sident's Cup World Cup, 주니어 선수권 대회, CISM 대회, TAMMER 대회 등 다양한 국제대회에 참가하게 되었다.